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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전 세종실록이 기록한 침향 이야기

세종 5~6년의 실록을 따라가 보니, 침향은 태종의 제사상과 대장경판 외교, 궁궐 내약방 도난 사건까지 조선의 기록 곳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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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전 세종실록이 기록한 침향 이야기

세종 5~6년의 실록 기사를 따라가 보니, 침향은 제사와 외교, 궁궐 약방, 국가 의례에 두루 등장했습니다.

조선 땅에서 한 조각도 나지 않던 향이 왕조의 공식 기록에 몇 번이나 남을 수 있을까요?

『조선왕조실록』은 왕의 하루와 나라의 큰일을 날짜별로 적은 기록입니다. 그런데 세종 초의 실록을 넘기다 보면 '침향(沈香)'이라는 두 글자가 생각보다 자주 눈에 띕니다. 일본 영주의 편지에도, 대장경을 둘러싼 외교 다툼에도, 궁궐 도난 사건에도 침향이 있습니다.

600년 전의 기록은 침향을 어떤 물건으로 기억하고 있을까요?

조선의 침향은 모두 바다 건너에서 왔습니다.

대나무 살 돛을 단 동아시아 범선이 화물 상자를 가득 싣고 안개 낀 새벽 바다를 항해하는 모습

침향은 왜 늘 바다를 건너와야 했을까요?

침향은 동남아시아의 침향나무가 상처를 입었을 때 수지가 배어들어 굳은 향목입니다. 수지가 가득 차 물에 가라앉을 만큼 무거워져야 '가라앉을 침(沈)' 자를 붙여 침향이라 불렀습니다.

문제는 이 나무가 한반도에서 자라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려는 송나라와 아라비아 상인을 통해 침향을 들여왔지만 조선에서는 고급 향약을 해외에서 대량으로 들여오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세종 초 실록에 남은 침향은 대부분 일본 사신이 바친 예물이었습니다.

태종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 규슈에서 제사용 침향이 도착했습니다.

어두운 나무 기둥이 선 사당 안에 귤 고임과 백자 제기, 촛대가 줄지어 놓인 조선 왕실 제사상

태종의 제사상에는 어떤 침향이 올랐을까요?

세종 5년(1423) 1월 1일, 규슈 총관 원의준(源義俊)의 사신이 예조에 편지를 올렸습니다. 한 해 전 승하한 태종을 애도하며, 직접 오지 못하는 것은 "험한 물결이 아득하기" 때문이라고 적었습니다.

원의준은 예물 목록을 두 갈래로 나눠 보냈습니다.

· 일반 예물: 소목 1,000근, 유황 5,000근, 곽향 40근, 감초 20근 등 · 제사 예물: 국수 30근, 칡가루 15근, 침향 2근, 밀초 50자루, 온주 귤 1,000개

제사 예물에 대해서는 "선대왕의 제사에 보태려는 것(用爲前大王祭供之資助者也)"이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침향 2근은 처음부터 태종의 제사상을 위해 고른 물건이었던 셈입니다.

흥미롭게도 사흘 뒤 다른 일본 사신이 사사로이 향을 올리려 하자, 영의정 유정현은 "신은 예가 아닌 것을 흠향하지 않는다"며 물리쳤습니다. 같은 향이라도 정식 절차를 밟았느냐가 받고 안 받고를 갈랐습니다.

세종 5년 한 해 동안 일본의 예물 목록에서 침향을 적어도 다섯 번 찾을 수 있습니다.

조선 궁궐 마당에서 삭발한 일본 승려 사신들이 유황 자루와 침향 덩어리를 앞에 두고 앉아 있고, 뒤로 관복 차림의 조선 관리들이 서 있는 모습

일본 영주들은 왜 침향을 몇 근씩 실어 보냈을까요?

실록의 예물 목록을 보면 유황이나 소목은 수백에서 수천 근씩 들어온 반면, 침향은 2근에서 30근 사이였습니다.

· 1월 1일, 규슈 총관 원의준: 침향 2근 · 1월 12일, 사쓰마 등 3주 태수 원구풍: 침향 10근 (유황 3,000근, 큰칼 10자루와 함께) · 5월 25일, 축주부 석성관사 평만경: 침향 2근 (유황 2,500근, 사탕 50근과 함께) · 9월 18일, 전 규슈 총관 원도진: 침향 5근 (대장경을 청하는 글과 함께) · 12월 25일, 일본 국왕의 사신 규주·범령: 침향 30근 (대장경판을 청하며)

조선은 이런 예물을 받고 답례품을 보냈습니다. 실록에 따르면 원구풍에게는 면포 540필, 평만경에게는 정포 160필과 면주 60필을 주었습니다.

침향 30근을 들고 온 사신들은 끝내 대장경판을 얻지 못했습니다.

대장경판이 빼곡히 꽂힌 서가 사이 통로 한가운데에 침향이 담긴 나무 상자가 열린 채 놓여 있는 모습

침향 30근으로 대장경판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세종 5년 12월 25일, 일본 국왕(아시카가 쇼군)의 사신 규주(圭籌)와 범령(梵齡) 등 135명이 대궐에 나아가 예물을 바쳤습니다. 별폭(別幅)에 적힌 목록은 경사류제 20권, 백련위 50단, 침향 30근(沈香三十斤), 백단 50근, 단목 1,000근, 후추 30근 등이었습니다. 이틀 뒤인 12월 27일에는 두 사신이 개인 예물로 침속향(沈束香)과 백단 등을 따로 바치며 예조에 글을 올렸습니다. 목적은 단 하나, 고려 때 새긴 대장경판이었습니다.

세종은 "대장경판은 한 벌뿐이라 줄 수 없다"며 금자 『화엄경』과 밀교 경판을 대신 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듬해 1월 2일, 두 사신은 음식을 끊었습니다. 경판 없이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쇼군에게 아뢰고 왔으니, 차라리 굶어 죽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종은 "경판을 얻고 못 얻고는 먹고 안 먹고에 달린 것이 아니다"라며 사신의 체모를 지키라고 타일렀고, 나흘 만에 두 사람은 다시 수저를 들었습니다. 1월 20일에는 일행이 본국에 보낼 보고서 초안에 "병선 수천 척을 보내 경판을 빼앗아 오자"는 내용이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세종은 "저들이 무도하더라도 나는 너그럽게 대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규주 일행은 문서를 빼돌린 수행승 가하(加賀)가 꾸며낸 말이라고 반박했고, 가하는 조선 통사가 시킨 일이라고 말을 바꾸는 등 진위는 끝내 분명히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월 7일, 쇼군에게 보낸 국서에서 이렇게 못 박았습니다. 대장경판은 "단 한 벌뿐이고, 실로 조종께서 대대로 전해 온 물건(只有一件, 實我祖宗相傳之物)"이라고요. 귀한 침향으로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임금께 올릴 침향이 궁궐 안에서 사라졌습니다.

조선 궁궐 약방의 커다란 약재 서랍장과 그 앞 탁자 위에 놓인 도자기 약 항아리와 약초 다발

세종은 왜 내약방의 문을 걸어 잠갔을까요?

세종 6년(1424) 2월 9일, 실록은 짧은 사건 하나를 적었습니다. 내약방의 심부름꾼이 임금께 올릴 약과 침향을 훔친 것입니다(內藥房使令盜進上藥及沈香).

세종은 "내가 먹는 물건은 지극히 중한데, 어찌 이런 간사한 무리를 안에 들여 부렸는가"라고 꾸짖었습니다. 지신사 곽존중과 동부대언 정흠지가 자신들의 책임이라며 엎드리자, 세종은 새 규칙을 내렸습니다. 앞으로는 약재를 받고 내주는 일 말고는 대언(뒷날의 승지)이라도 내약방에 드나들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한 달 뒤에는 관노들이 내약방에서 주사와 곽향 같은 약재를 훔친 일로 사형까지 논의되었습니다. 임금의 약재를 훔치는 일은 사형이 논의될 만큼 무거운 죄였고, 세종은 내약방의 출입을 막아 이를 지키려 했습니다.

명나라 황제의 제물 목록에는 '전향'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노란 비단 앞에 색이 짙은 것부터 옅은 것까지 쌓인 침향 조각들과, 침향 조각이 담긴 물잔이 놓인 모습

명나라 황제가 보낸 '전향'은 침향과 무엇이 달랐을까요?

세종 5년 4월 6일, 태종의 제사를 지내러 온 명나라 사신의 문서에는 황제가 보낸 제물이 적혀 있습니다. 생초 500필, 마포 500필, 단향 1주, 그리고 전향(箋香) 3근입니다.

전향은 침향 계통의 향목입니다. 송나라 때의 『제번지(諸蕃志)』는 같은 침향나무에서 나온 향목을 겉에 맺힌 수지의 비율로 나눴습니다.

· 3할이면 잠향(暫香) · 5할이면 속향(速香) · 7할이면 전향(箋香) · 10할이면 침향(沈香)

3세기 무렵의 『남주이물지(南州異物志)』도 물에 넣으면 곧 가라앉는 것을 침향이라 불렀으니, 전향은 침향 바로 아래 등급이었던 셈입니다. 명나라는 이 향을 조선 국왕의 제사에 보내는 공식 제물로 골랐습니다. 그리고, 2026년 학술지 RSC Advances에 실린 연구는 밀도가 높아 가라앉는 침향일수록 색이 짙고, 분자량이 큰 크로몬 이량체가 더 많다는 결과로, 이 오래된 기준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했습니다.

600년 전의 기록은 지금도 침향을 고르는 기준과 맞닿아 있습니다.

햇살이 드는 책상 위, 붉은 끈으로 묶은 한지 고서 옆에 짙은 흑갈색 침향 조각과 물 한 잔이 놓인 모습

600년 전의 기록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요?

세종 초 2년 남짓한 기록만 보아도 침향은 제사, 외교, 궁궐 약방, 국가 의례를 모두 넘나듭니다. 일본 영주는 태종의 제사상에 침향을 보탰고, 쇼군의 사신은 침향 30근을 들고 와 대장경판을 청했으며, 궁궐의 심부름꾼은 임금의 침향에 손을 댔다가 내약방의 문을 닫게 만들었습니다.

이 글은 실록의 기사를 따라 정리한 것으로, 침향 자체를 분석한 연구는 아닙니다. 다만 '물에 가라앉는 것이 상품'이라는 옛 문헌의 기준은 현대의 밀도 측정 결과와 잘 맞아떨어집니다.

조선 땅에서 나지 않았기에 더 귀했던 향. 오래 아껴 온 것일수록, 그 가치는 오래된 기록 속에 남아 있습니다.

 

참고 문헌

『세종실록』 세종 5년(1423) 1월 1일·1월 4일·1월 12일·4월 6일·5월 25일·9월 18일·12월 25일·12월 27일 기사. 원문 보기 (위키문헌)

『세종실록』 세종 6년(1424) 1월 1일~28일·2월 7일·2월 9일·3월 6일 기사. 원문 보기 (위키문헌)

『세종실록』 19권, 세종 5년 1월 1일 3번째 기사. 국역 보기 (국사편찬위원회)

『세종실록』 22권, 세종 5년 12월 27일 7번째 기사. 원문 보기 (국사편찬위원회)

이승호. 「침향(沈香), 고귀하고 엄숙한 향기」. 동국대학교 문화학술원 HK+사업단 칼럼. 원문 보기

Yuan, Y., Yang, M., Zhao, Y., & Qiu, Z. (2026). Unraveling the science of "sinking and dark-colored" superior agarwood through density, color, and metabolomics. RSC Advances, 16(17), 15697–15708. 논문 원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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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명 안내 - 식품의약품안전처의 고시문서인 '대한민국약전외한약(생약)규격집'과 발간문서인 '한약재 관능검사 해설서', '원색 한약재감별도감'에는 침향을 'Aquilaria agallocha Roxburgh(아퀼라리아 아갈로차 록스버그)'의 수지가 침착된 수간목으로 정의하고 있고, 한국한의학연구원의 '한약자원연구센터'의 용어사전에서도 '아갈로차'를 침향의 기원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단, 식약처의 고시문서인 '식품공전'에서는 식용 원료 침향으로 Aquilaria agallocha Roxburgh와 Aquilaria malaccensis Lam.을 함께 등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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