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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침향나무는 어떻게 '값비싼 향'을 만들까

인도 연구팀이 원조 침향 '아갈로차'의 게놈을 통째로 읽어 향을 만드는 CYP 효소 유전자 136개를 찾아냈습니다. 이 유전자들은 나무가 상처나 감염을 받을 때 켜지도록 설계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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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침향나무는 어떻게 '값비싼 향'을 만들까

과학자들이 아갈로차 침향의 유전자를 통째로 읽어 향을 만드는 '효소 설계도' 136개를 찾아냈습니다.

 

왜 상처 입은 나무만 향을 낼까

침향(沈香)에는 오래된 수수께끼가 하나 있습니다. 아퀼라리아(Aquilaria) 나무는 평소엔 그저 평범한 나무입니다. 그런데 상처를 입거나 곰팡이에 감염되면 그때부터 나무 속에 검고 향기로운 수지가 서서히 쌓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침향입니다. 멀쩡한 나무에서는 만들어지지 않고 오직 '다친' 나무만이 이 값비싼 향을 빚어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나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상처라는 신호가 어떻게 향으로 바뀌는 걸까요? 이 질문에 답하려면 성분을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나무의 '설계도', 즉 유전자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2023년 인도 연구팀이 바로 그 설계도를 펼쳐 들었습니다.

분자를 이어 붙여 향을 만드는 효소의 작업.

향을 만드는 것은 '효소'라는 일꾼

침향의 향과 약효를 책임지는 핵심 성분은 세스퀴테르펜과 크로몬이라는 물질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분은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나무 안에서 이 분자들을 조립하고 다듬는 '일꾼'이 필요한데, 그 일꾼이 바로 효소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효소 집단이 있는데 '사이토크롬 P450', 줄여서 CYP라 불리는 효소군입니다. 이들은 식물이 향기 성분이나 약효 물질을 만들 때 없어서는 안 될 만능 일꾼으로 분자를 자르고 붙이고 산소를 더하는 온갖 화학 반응을 담당합니다. 침향의 향이 만들어지는 공정에서 이 CYP들이 핵심 역할을 한다면, "어떤 CYP가 몇 개나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곧 향의 제조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되는 셈입니다.

과학자들은 아갈로차의 유전자를 통째로 읽었다.

설계도에서 찾아낸 136개의 일꾼

인도 연구팀은 아갈로차(Aquilaria agallocha)의 게놈 전체를 뒤졌습니다. 아갈로차는 예로부터 전해져오는 '원조 침향' 계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연구팀은 방대한 유전 정보 속에서 CYP 효소 유전자 136개를 찾아냈고 이들을 특성에 따라 8개의 큰 갈래와 38개의 세부 집단으로 정리했습니다.

흥미로운 단서는 이 유전자들의 '스위치' 부분에서 나왔습니다. 각 유전자에는 언제 켜지고 꺼질지를 결정하는 조절 부위가 있는데 여기에 스트레스와 호르몬에 반응하는 요소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효소들은 나무가 상처나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작동하도록 설계돼 있었던 것입니다. "다친 나무만 향을 낸다"는 오래된 현상이 유전자 수준에서 그 이유를 드러낸 순간입니다.

상처를 경계로, 나무는 향을 만들기 시작한다.

실제로 '상처'에 반응했다

연구팀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실험으로 확인했습니다. 이 136개 중 세스퀴테르펜과 페닐프로파노이드(향·약효 성분) 생산에 관여할 것으로 보이는 후보 유전자들을 골라, 실제로 감염된 나무와 스트레스를 준 세포에서 이들이 더 활발히 작동하는지 살펴본 것입니다.

결과는 예상과 맞아떨어졌습니다. 감염된 아퀼라리아 나무, 그리고 스트레스 물질(메틸자스모네이트)로 자극한 세포에서 이 후보 유전자들의 활동이 뚜렷하게 증가했습니다. 상처와 감염이라는 신호가 실제로 향 성분 공장의 스위치를 켜고 있었던 것입니다.

검은 수지 한 조각에 담긴 정교한 화학의 세계.

이 연구가 특별한 이유

지금까지 침향 연구가 대부분 "침향 안에 어떤 성분이 있나"를 밝히는 데 집중했다면 이 연구는 한 걸음 더 근원으로 들어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침향은 그 성분을 어떻게, 왜 만들어내는가"라는 메커니즘의 문제인데, 성분이 결과물이라면 이 연구는 그 결과물을 찍어내는 공장의 설계도와 스위치를 들여다본 셈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침향나무는 워낙 느리게 자라고 무분별한 채취로 멸종 위기에 놓여 CITES로 국제 거래가 통제되는 귀한 자원입니다. 만약 향을 만드는 유전자와 그 작동 원리를 정확히 안다면 언젠가 나무를 무리하게 베지 않고도 향 성분을 효율적으로 얻거나 생산을 늘릴 길이 열릴 수 있습니다. 연구팀이 이 설계도 해독을 "향 화학물질의 대량 생산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본 이유입니다.

값비싼 향으로만 소비되던 침향. 그 뒤에는 상처라는 신호를 향으로 바꾸는 정교한 유전자 공정이 숨어 있었습니다. 나무가 다쳤을 때 조용히 켜지는 136개의 일꾼들, 그리고 그들이 빚어내는 검은 수지. 이번 연구는 그 오래된 신비의 설계도를 처음으로 펼쳐 보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이 수백만 년에 걸쳐 다듬어온 지혜를 이제 과학이 한 줄 한 줄 읽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참고 논문: Das A., Begum K., Akhtar S. et al., "Genome-wide investigation of Cytochrome P450 superfamily of Aquilaria agallocha," International Journal of Biological Macromolecules, 234, 12375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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